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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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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포플러처럼 2012. 1. 3. 09:52

2012.1.3. 화

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중에

정일근 시인이 정약용의 마음이 되어 쓴 시를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옮겨 봅니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제1신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는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宜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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