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플러의 소소한 흔들림
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본문
2012.1.3. 화
정약용의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중에
정일근 시인이 정약용의 마음이 되어 쓴 시를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옮겨 봅니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제1신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는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宜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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