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플러의 소소한 흔들림
설국 본문
2014. 12. 7. (일),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민음사
대학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눈에 대한 묘사와 마을 풍경,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주인공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의 사랑이야기 전개와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읽었다면
다시 읽으며 느낀 점은
시마무라의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 소용없음(헛수고)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읽었습니다.
책도 예전에 읽던 책이 있건만
새로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번역도 그렇고, 종이질도 그렇고
새롭게 읽고 싶어서......ㅎ
어쩌면 스토리 전개가 거의 없는
소설 구성상 사건 전개는 미흡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참 잘 표현했습니다.
예전에 읽을 때는
고마코와 요코 사이의 어정쩡한 시마무라의 태도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유산으로 여행을 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부인도 있는 시마무라의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고
사랑하지만 새롭게 출발할 수 없고
깊이 빠질 수 없는
어쩌면 나이 든 사람들의 비겁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서일까요.......ㅎ
시마무라의 이런 "헛수고"라는 허무한 마음은
어쩌면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누나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조부모와 살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마저 돌아가시고
혼자 외롭게 살았습니다.
작가 본인도 74세에
가스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고독과 허무가 깊이
베어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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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7쪽 -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와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쩐지 시마무라는 마음속 어딘가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 16쪽 -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19쪽 -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을 할 수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 40쪽~41쪽 -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 55쪽 -
시마무라는 뭔가 비현실적인 것을 타고
시간도 거리감도 사라진 채 덧없이 몸이 실려가는 듯한
방심 상태에 빠져들자,
단조로운 차량의 울림이 그녀의 말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말들은 짧게 뚝뚝 끊어지면서도
여자가 힘껏 살아가고 있다는 표시인 탓에 듣기 괴로울 정도였기 때문에,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멀어져 가는 지금의 시마무라에겐
여수(旅愁)를 돋우는 데 불과한
이미 멀어진 소리였다.
- 76쪽~77쪽 -
자세히 보니, 반대쪽 삼나무숲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잠자리떼가 흐르고 있었다.
민들레 솜털이 떠다니는 듯했다.
산자락의 강물이 삼나무 가지 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흰싸리 같은 꽃이 높다란 산 중턱에 흐드러지게 피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시마무라는 지루한 줄 모르고 오래 바라보았다.
- 78쪽 -
제방 위에 참억새를 심은 울타리가 있었다.
참억새는 연노랑 꽃이 한창이었다.
갸름한 이파리가 한 가닥씩 분수처럼 아름답게 퍼져 있었다.
- 94쪽 -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성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 95쪽 -
건너편 기슭의 급경사 진 산허리에는 억새 이삭이 온통 꽃을 피워 눈부신 은빛으로 흔들렸다.
눈부신 빞깔이긴 해도 마치 가을 하늘을 떠도는 투명한 허무처럼 보였다.
- 100쪽 -
정적이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질 듯한 삼나무숲을 빠져나와
스키장 기슭의 선로를 따라가자,
곧바로 묘지였다.
- 102쪽 -
화물열차가 지나가 버리자,
눈가리개를 벗은 듯이 선로 저편의 메밀꽃이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줄기 끝에 가지런히 꽃을 피워 참으로 고요했다.
- 103쪽 -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ㅅ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 110쪽 -
시마무라에게 휘감겨오는 고마코에게도 뭔가 서늘한 핵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한층 고마코의 몸 안 뜨거운 한 곳이 시마무라에게는 애틋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애착은 지지미 한 장만큼의 뚜렷한 형태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옷감은 공예품 가운데 수명이 짧은 편이긴 해도,
소중하게만 다루면 50년 이상 된 지지미도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로 입을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적 친밀감은 지지미만한 수명도 못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고마코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 133쪽 -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세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 1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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