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플러의 소소한 흔들림
하얼빈(독서통신 82) 본문
2023. 1. 19. 목, 하얼빈, 김훈, 문학동네
지난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뮤지컬 영화 "영웅"을 봤다.
영화 한편에 내심장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 하얼빈을 마저 읽었다.
영화 "영웅"도 책 "하얼빈"도 안중근 의사 이야기이다.
안중근이 이토를 총살하기까지 이야기
<줄거리>
1908년 1월 7일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은 열두살 어린 나이에 일본 도쿄의 황궁에서 천황 메이지를 만났다.
황태자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다.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고종의 차남 이척을 순종 황제로 세우고
순종의 이복동생이며 고종의 아들 이은을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다.
스물 일곱살 조선 청년 안중근은 1905년 12월에 상해에서 고향 황해도 해주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이며 열아홉 살에 빌렘 신부에게 세레 받았다.
1907년 1월 7일 순종황제는 서울역에서 출발해 남순일정에 들어갔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일제의 강요 때문이었다.
안중근 가문은 천주교 신자로 동학군과 싸우기도 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그 소식은 안씨 문중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이야기되었고,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 행을 결심했다.
황해도 신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기차로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기선으로 원산으로,
원산에서 기선을 타고 러시아로 갔다.
안중근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군대 해산이 있은 후의 민심을 살폈다.
그리고 동생 안정근에게 멀리 떠나감을 통보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산간마을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의 사는 꼴을 살폈다.
그리고 이토를 죽이기로 아니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안중근은 의병으로 활동했다.
최근 상영중인 영화의 내용에도 나오는 부분인데, 의병들이 잡은 일본 포로들을 안중근은 석방했다.
그러나 돌아간 포로들의 제보로 회령의 의병들은일본군에 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연추로 돌아온 안중근은 패배로 인해 운신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하숙집에서 날짜 지난 신문기사에서 순행하는 순종과 이토의 사진을 보았다.
1909년 10월 19일 하숙집을 나와 연추의 포시예트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배를 탔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사에서 이강 주필을 만나고,
10월 하순경 이토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와 회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중근은 우덕순의 하숙방으로 갔다.
회령에서 흩어질 때 우덕순은 두만강을 혼자 건너 블라디보스톡에 왔고 담배팔이를 했다.
이토는 조선 통감부에서 물러나 추밀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개인 여행이지만 공식 일정도 수행하며 여순 대련, 봉천, 장춘, 채가구, 하얼빈을 거쳐 하바롭스크까지 여행할 계획이었다.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거사를 계획했다.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행 열차를 탔다.
여비는 이석산에게서 빌렸다. 아니 빼앗았다.
이토는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오고 있다.
안중근은 25일 저녁 하얼빈의 김성백의 집에서 묵었다.
안중근은 정대호에게 아내 김아려와 아이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거사 후에는 가족도 조선에서 살기 힘들 것이었다.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를 쏘았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황태자 이은은 일본에서 의지해 온 이토의 죽음을 알고 상심했다.
이은은 순종에게 전문을 보냈고 순종은 메이지의 분노가 두려워 이토를 추모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러시아 헌병대는 안중근을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했고,
일본 관동도독부는 미조부치 다카오를 하얼빈 총영사관으로 파견해 사건을 맡도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정대호는 구속되었고,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와 아들 분도도 취조했다.
안중근은 이토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안응칠 역사>를 썼다.
관동도독부는 1910년 3월 25일 사형을 정해놓았으나,
25일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의 서른일곱살 생일이어서 집행은 하루 연기되었다.
3월26일 안중근의 형이 집행되었다.
시체는 가족들에게 인계되지 않았다.
3월 29일 안중근 사건 수사와 재판, 사형집행 관리들에게 상여금이 내려졌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영을 어기고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해주고
신천으로 돌아와 안중근이 26일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27일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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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주말에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벅차올랐다.
눈물을 닦으며 극장을 나와 아직 읽기 시작조차 못한 책 "하얼빈"을 단숨에 읽었다.
책은 영화와 달리 내 가슴을 차갑고 딱딱하게 만들었다.
차갑고 단조롭지만 날카롭고 정확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안중근이라는 청년은 서른 한살의 젊은 나이에
살인을 반대하는 교리의 천주교 신자이면서
동시에 민족에 대한 소명과 책임감을 어떻게 찾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는지
새삼 그 결심과 가치 정립에 무한한 존경심이 생긴다.
나는 현실의 벽에 항상 굽신거리며 타협하고 복종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내 삶의 가치와 소신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했을까.
아마도 지금처럼 현실의 상황에 복종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중근 의사의 간결하면서 목숨를 건 소신의 실천이 정말로 놀랍기만 하다.
소시민인 내가 그 시대 사람이라면,
처자식과 어머니를 모셔야하는 장남이고, 천주교 신자이면서, 내 목숨도 내던진 결심을 할 수 있을까...
안중근은 세계 평화, 동양의 평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하여, 침략의 작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이토를 쏘기로 결정하고,
거사 후에는 도망치지 않고 "코레아 후라"를 외치며 정당성을 담담하게 펼쳐나가고,
죽음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독립국에 살고 있음은 안중근과 독립을 위해 무수히 죽어간 이름조차 모르는 조상들 덕분이다.
안중근의 가묘만 남아있고 그 뼈조차 찾지 못하는 후손들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만 하다.
독립된 조국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그 유해라도 모셔와야 하는데...
소설 후기의 내용을 읽으며,
김아려와 그 자손들,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게 타국에서 살았고 외롭게 죽어갔는지 가슴이 아프다.
오랜만에 소시민인 내가 애국심과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소설 한권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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