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플러의 소소한 흔들림
쉰 번째 가을날의 단상 본문
쉰 번째 가을날의 단상
이*희(수정)
(2017.11.14.)
창문으로 얼핏 바라 본 하늘이 눈이 시리게 파랗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다, 보는 가슴 속까지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하늘 빛 때문에 커피 한잔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뒷마당을 지나 언덕길을 걸었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은 큰길로 이어지고 마을로 이어지고 바다로 이어지고 나뭇가지처럼 연결된다. 오전 내내 서류와의 실랑이로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상쾌한 가을바람에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이 길가 야트막한 언덕 가득 화사한 꽃들이 수채화처럼 피어났던 지난봄이 엊그제 같은데, 하얀 꽃이 풍성했던 이팝나무는 어느새 노랗게 물들었고 붉게 물든 왕벚나무 단풍잎은 지난 밤 가을비에 수북하게 떨어졌다.
유난히 빨간 나뭇잎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춘기 이후 오랜만에 낙엽 하나를 주워 자세히 보았다. 가느다란 줄기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다. 나뭇잎 속에 나무가 있다.
문득 오래 전에 책에서 읽었던 프랙탈 개념이 생각났다. 나뭇가지 모양, 동물의 혈관 모양, 창문에 성에가 자라는 모양,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리아스식 해안, 산맥의 모양 등 우주의 모든 것이 동일한 모양의 반복으로 확장된다는 개념이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은 생명을 다했다. 나뭇잎은 죽었지만 나무는 살아 있다. 사람의 죽음도 낙엽과 같을까? 사람은 타고 난 수명만큼 살다가 죽지만 인류는 여러 계절을 살아내는 나무처럼 세대를 반복하고, 인류도 나무가 죽듯이 언젠가는 멸종할지 모른다. 공룡이나 맘모스처럼 다른 생명체가 생겨나서 또 다른 나무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떨어진 나뭇잎에서 죽음을 떠올리니 쓸쓸해졌다. 이 낙엽도 새싹인 시절이 있었겠지. 가을이 오기 훨씬 전 봄이었던 것처럼. 나는 계절의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
내 멋대로의 생각이지만, 사람의 나이 십대와 이십대는 봄, 삼십대 사십대는 여름, 오십대 육십대는 가을, 칠십대 이후는 겨울이라면, 나는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었다. 이제 겨울이 멀지 않았다. 화려한 단풍도 겨울이면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간다는 건 죽는 것이다.
얼마 전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배우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나는 가까이 알고 지냈던 사람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깝고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문득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까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죽음의 순간,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까.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 육체는 물질일 뿐이고 물질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영혼은 어디로 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불교를 믿는 사람의 영혼은 극락으로 갈까. 그럼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의 혼은 어디로 갈까. 영혼이 있다면 죽음의 순간 영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육체를 떠날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죽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잠깐 동안이라도 그동안 영혼이 살았던 육체를 잠시 둘러보고 슬퍼하는 가족들도 돌아보고 그렇게 떠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떠나간 영혼이 천국이나 극락으로 간다면 그곳은 너무 복잡할 것 같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하지만 여기에도 프랙탈 개념이 적용되어 영혼은 새로 태어날지 모르겠다. 사람으로 또는 동물로 아니면 식물로……. 아, 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인가. 내가 진정 바라는 건 죽음이 그냥 끝이었으면 좋겠다. 천국도 지옥도 없고, 또 다시 태어나서 살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도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으면 좋겠다. 스위치가 꺼지듯 영혼도 딸깍 소멸했으면 좋겠다.
나는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서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박완서님이 어느 수필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수많은 고민과 선택을 마주해야 했던 젊은 시절보다 부자는 아니어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고무줄 바지를 입은 듯 헐렁하게 살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서 지금 보다 더 현명한 선택을 해서 더 훌륭하게 살아낼 것 같지도 않다. 프랙탈 개념처럼 삶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다. 요즘 드라마 제목처럼 이번 생이 처음이어서 서툴고 힘들었지만, 처음 살았기 때문에 신선하고 즐거웠다.
나에게 죽음은 어떻게 올까. 나는 알 수 없지만, 당황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낙엽을 보다가 너무 멀리 왔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곱게 물든 단풍잎 몇 개 주워 책갈피에 끼워놓고 겨울에도 가끔 가을이 그리울 때 봐야겠다.
'♣ JU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1) | 2024.02.27 |
---|---|
이런 악기 보셨나요? (0) | 2013.10.29 |